1989년 시위에 참여한 인권운동가 전원이 석방되었지만, 대부분은 민주화 운동 때문에 재수감되었다(사진=픽사베이)
1989년 시위에 참여한 인권운동가 전원이 석방되었지만, 대부분은 민주화 운동 때문에 재수감되었다(사진=픽사베이)

천안문사태 후 30여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중국 당국은 당시 만행을 인정하지도 않았으며, 희생자와 유가족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여전히 인권운동가들 대부분 민주화 운동을 진행하다 재수감하는 사례가 많은 것으로 드러났다.

정부의 진실 왜곡과 억압은 중국 인권운동가들의 인권을 수호하기 위한 시위의 도화선이 되었다. 인권운동가들은 중국의 자유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크게 희생되었다. 인권운동가 다수는 임의적으로 구금을 당했으며, 감옥에 수감된 이들도 있다. 구금 도중 사망한 이들도 있으며, 과거 중국 당국이 가한 고문 때문에 현재 신체적 고통과 정신적 후유증을 안고 살고 있는 이들도 있다.

중국 지도부가 1989년 천안문사태를 비롯한 주요 도시에서 발생한 각종 시위 때문에 개인의 운동과 평화 비판을 억압하자 인권운동가들은 스스로를 희생했다. 민주주의 개혁과 표현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촉구하는 학생 운동이 벌어졌다. 인권운동가들은 민주주의 개혁을 위해 힘써온 공산당 지도자 후야오방의 사망 후, 개방과 민주주의 정권 수립을 위한 시위를 벌였다. 날이 갈수록 시위에 참여하는 학생들이 많아지자 시민들도 시위에 동참했으며, 5월 중순 경에는 수만명이 시위에 참여했다.

학생들은 중국의 교육 제도가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갖춘 경제 체제를 준비하기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교육 제도도 시위의 주 원인이 되었으며, 정부의 일부 지도자들은 시위대의 목소리에 공감했다. 반면, 공산당원 대다수는 시위대가 공산당 통치의 존립 자체를 위협한다고 판단했다.

중국 인민들에게 등 돌린 중국 정부

시위 참가자 수가 증가하자 중국 정부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며, 520일에 계엄령을 선포하며 군인 25만 명을 베이징에 투입시켰다. 시위 참가자 수가 많아, 군대는 시위를 진압하지 못했다. 그러나 64, 군대는 시위대를 향해 고무탄을 발사했다. 당시 수 천 명이 군대를 공격하고 군용 차량에 불을 질렀다. 그 결과, 많은 이가 사망했으며 1만 여 명이 체포되었다. 인권 단체들은 사망자 수를 241명으로 집계했으며, 그 중 182명은 민간인, 36명은 학생, 10명은 군인, 13명은 공안인 것으로 확인됐다. 동시에 부상자 수는 7,000명으로 집계됐으며, 그 중 5,000명은 군인, 2,000명은 민간인으로 확인되었다. 중국 정부는 현재까지 당시 정확한 사망자 수를 발표하지 않는다.

시위 후 수 십년이 지난 현재, 중국 당국은 중국 전역에서 시위를 추모하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취하고 있다. 그 결과, 수많은 인권운동가들은 1989년 시위 당시 이루고자 했던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서로 연대하고 있다.

20033, 젊은 이주 노동자 순지강(Sun Zhigang)이 거주허가증을 소지하지 않고 외출했다는 이유로 구금 후 범죄인 송환 도중 구타를 당해 사망했다. 이후 중국 전역이 충격에 휩싸이게 되었으며, 지식인들은 중국의 법치주의 개혁을 촉구했다.

변호사와 인권운동가, 언론인 단체들은 "권리 수호" 네트워크를 형성해 국경 단속과 법정에서의 피고인 변호, 인권 문제 감시 및 보고, 정치 개혁 촉구, 관료들의 부정행위 폭로 등과 같은 일을 했다. 중국 당국은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준비라는 명분하에 개혁 추진 세력이 제대로 의견을 표출하지 못하게 막았다. 20068, 중국 가족계획법의 인권 유린 사태를 폭로한 시민운동가 천광청(Chen Guangcheng)이 징역 43개월형을 선고 받았다. 200612월에는 기독교 신도들을 변호한 고지셩(Gao Zhisheng)은 국가 권력을 저해시킬 목적으로 선동한다는 이유로 징역 3년형을 선고 받았다.

2008, 쓰촨성 대지진 사태 후 중국 당국은 지진 피해 관련 사망 정보를 공개해달라는 시민운동가들과 유가족을 억압했다. 인권운동가 황치(Huang Qi)는 지진 피해로 사망한 학생 명단을 작성해 공개했다는 이유로 징역 5년형을 선고 받았다. 2011년에는 텅비아오(Teng Biao), 장티아용(Jiang Tiayong), 아이웨이웨이(Ai Weiwei)는 온라인 상에서 중국의 아랍의 봄 혁명이 일어나도록 선동했다는 이유로 중국 당국에 끌려갔다.

2012년부터 인권운동가와 관련 활동에 대한 억압과 단속이 증가했다. 중국 정부는 인권변호사들과 인권운동가들이 법률 체계를 기반으로 인권을 보호하고자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짓 기소를 통해 노골적으로 정치적 발언을 한 반대 세력을 무자비하게 억압했다.

1989년 당시 시위에 참여했던 운동가 전원이 석방되었지만, 그 중 다수는 민주화 운동을 지속적으로 벌여와 재수감되었다. 2011년에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은 류시안빈(Liu Xianbin)과 징역 9년 형을 선고 받은 천웨이(Chen Wei), 징역 10년형을 선고 받은 천시(Chen Xi), 징역 106개월형을 선고받은 천수칭(Chen Shuqing)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모두 1989년 시위와 관련해 중국 당국을 비판하는 기고문을 게재해, 선동을 한다는 이유로 기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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